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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稿



永登浦、最初の江南 




 永登浦、最初の江南  永登浦(YEONG/DEUNG/PO)はソウル市の西南部に位置し、厳密にはソウル市を構成する25の区の一つとしての「永登浦区」を指す。しかし、韓国人が「永登浦」と言った時、この地名は「永登浦区」より広い、ソウル市の西南部一帯を漠然と指す場合が多い。  

朝鮮時代に存在した始興郡(SIHEUNGGUN)の最北端に位置する閑散たる農村だった「永登浦」は、帝国主義日本による韓半島の植民地化を前後して、まず交通の要地として浮上した。日本が開港させた仁川(INCHEON)と漢陽(HANYANG)とを結ぶ京仁鉄道、そして、韓半島の中で最も日本に近い港である釜山(BUSAN)と漢陽とを結ぶ京釜鉄道とが永登浦で結節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  

二つの幹線鉄道が交差することによって、農村から交通の要地へと様変わりした永登浦は、やがて、韓半島における最初の工業地帯として発達するようになる。私の手元にある大木春三著『趣味の朝鮮の旅』(朝鮮印刷株式会社、1927)には、韓半島が日本の一部になって10年余りを過ぎた時点での永登浦の様子が次のように綴られている。「永登浦:此(こ)の駅から京仁線が岐(わか)れ、附近一帯は工業地として近年急速の進歩を来(きた)し、朝鮮皮革会社、煉瓦(れんが)工場、大日本麦酒(ビール)工場等がある」(54・55頁)。この本に添付されている「京城遊覧案内図」には、広い意味での永登浦の東部の地名は見えるものの、永登浦駅や駅前の工場地帯はまだ描かれていない。1920年代の永登浦がまだ始興郡の一部だったために、京城観光の対象にはならなかったのであろう。  

交通の要地であり、また工業地として発達しつつあった永登浦の未来には二つの選択肢が置かれていた。一つは「永登浦市」として独立する道、もう一つは植民地化によって漢陽から名前を変えた京城に編入される道であった。地域の政治家らの間で激しい論戦が展開された末に、永登浦は1936年に京城府に編入する。1936~37年の間に製作されたチラシ「京城觀光のしおり」には「キリンビール入口」「永登浦出張所」「永登浦駅前」「サッポロビール前」などのバス停が見える。列車とバスによって永登浦が京城府の一部となっていく様子がうかがえる。  

すでに工業化の道を歩んでいた永登浦は、京城府に編入された以降、植民地朝鮮の随一の工業地帯として飛躍的に発展するようになる。1939年に京城府と仁川とを一つの都市に統合する「京仁一如」計画が提案されると、永登浦は現在の仁川市の東北部に当たる富平(BUPYEONG)に形成しつつあった軍需産業地帯と一緒に「京仁工業地帯」と呼ばれるようになる。  

工業化に伴って市街地の整備も急がれ、同じ1939年には「市街地計画永登浦土地区画整理計画」が発表された。この計画書に含まれている平面図には、永登浦に散在する工場や背後住宅地帯、諸工場と永登浦駅とを結ぶ引込線が緻密に配置されている様子が描かれている。狭義の「永登浦区」の市街地の形はこの計画によって完成し、現在に至る。  

この頃より、漢陽=京城の旧市街地に対して永登浦は「江南(こうなん、GANGNAM)」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そう、PSYが「江南スタイル」を歌って世界的に知名度を上げた「江南」は、元々ここ永登浦の別名だったのである。江南=永登浦に対して、現在の江南は「永東(YEONGDONG)」と呼ばれた。「永登浦」の東という意味である。最初の江南だった永登浦に比べると、現在の江南は何もない、ただ「永登浦の東」としか呼ぶようがない農村地帯だったのである。1990年に刊行された『永登浦区誌』の冒頭には、江南とは元々永登浦を指す別名だったのに、今となってはその別名を奪われたことが悔しい、と書かれている。  

最初の江南だった永登浦は、今なお交通の要地として、また、政治の中心である国会議事堂の所在地として、旧漢陽、現在の江南と共にソウル市の三核としての地位を維持している。しかし、工業地帯としての永登浦の面影は日に日に薄れている。工場は地方や国外に移転し、その跡地には高級マンションが再建築されつつある。工業地帯は20世紀前期の永登浦に忽然と顕れ、いつの間にか消えてしまった。多くのソウル市民は永登浦の工業地帯からの脱皮を残念に思わない。むしろ喜んでいると言ってもいい。  

このような現状を残念に思った私は、永登浦を隈なく歩きながら工業地帯の跡を探してきた。その過程で、前述した富平の工業地帯や金浦空港などを含む富平盆地の出身としての自意識を抱いたKIM=GEMINI氏に出会った。氏と一緒に永登浦や仁川などの工場を探訪した縁で、愛する永登浦に関する小文を書く次第である。コロナ禍が終息した後にソウルを訪れるであろう皆さんには、現在の江南のみでなく、最初の江南である永登浦にも足を運んでいただけると嬉しい。 金時徳(文献学者・踏査家)  




영등포, 최초의 강남  




영등포는 서울시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엄밀하게는 서울시를 구성하는 25개 구 가운데 하나인 “영등포구”를 가리킨다. 그러나 한국 시민이 “영등포”라고 말할 때에는“영등포구”보다 넓은 서울시 서남부 일대를 막연히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 존재한 시흥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 한적한 농촌이던 “영등포”는, 제국주의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시기를 전후하여 우선 교통의 요지로서 부상한다. 일본이 개항시킨 인천과 한양을 연결하는 경인철도, 그리고 한반도에서 가장 일본과 가까운 항구인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경부철도가 영등포에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간선 철도가 교차하게 된 영등포는 농촌에서 교통의 요지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반도 최초의 공업지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소장한 오키 슌조(大木春三) 저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 (朝鮮印刷株式会社, 1927)에는, 한반도가 일본의 일부가 된지 십여년이 지난 시점의 영등포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영등포 : 이 역에서 경인선이 갈라지며, 이 부근 일대는 공업지로서 근년 들어 급속한 진보를 이루어 조선피혁회사, 벽돌공장, 대일본맥주 공장 등이 있다(永登浦:此の駅から京仁線が岐れ、附近一帯は工業地として近年急速の進歩を来し、朝鮮皮革会社、煉瓦工場、大日本麦酒工場等がある)」 (54•55쪽) 이 책에 첨부되어 있는 「경성 유람 안내도(京城遊覧案内図)」에는 넓은 의미의 영등포의 동부 지명은 보이지만, 영등포역이나 역 앞의 공장지대는 아직 그려져 있지 않다. 1920년대의 영등포는 아직 시흥군의 일부였기 때문에, 경성 관광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교통의 요지이자 공업지대로서 발달하고 있던 영등포의 미래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영등포시”로서 독립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양에서 이름을 바꾼 경성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지역의 정치가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오간 끝에, 영등포는 1936년에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36~37년 사이에 제작된 관광안내 전단지 「경성 관광 안내(京城觀光のしおり)」에는 「기린 맥주 입구(キリンビール入口)」 「영등포 출장소(永登浦出張所)」 「영등포역앞(永登浦駅前)」 「삿포로 맥주 앞(サッポロビール前)」과 같은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열차와 버스에 의해 영등포가 경성부의 일부로서 연결되어 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공업화로의 길을 걷고 있던 영등포는, 경성부에 편입된 뒤로 식민지 조선 유수의 공업지대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39년에 경성부와 인천을 하나의 도시로 통합하는 “경인일여(京仁一如)” 계획이 제안되자, 영등포는 부평에 형성되고 있던 군수산업지대와 함께 “경인공업지대”라고 불리게 된다. 

공업화에 따라 시가지 정비가 시급한 과제가 되자, 마찬가지로 1939년에는 「시가지계획 영등포 토지구획정리계획(市街地計画永登浦土地区画整理計画)」이 발표되었다. 이 계획서에 포함되어 있는 평면도에는 영등포 곳곳에 자리한 공장과 배후 주거지, 공장과 영등포역을 잇는 인입선이 치밀하게 배치된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협의의 영등포구 시가지는 이 계획에 의해 형태를 갖추어 오늘에 이른다. 

이 무렵부터 한양=경성의 구 시가지에 대하여 영등포는 “강남”이라 불리게 된다. 가수 싸이가 “강남 스타일”을 불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강남”은 원래 영등포의 별명이었다. 강남=영등포에 대하여 현재의 강남은 “영동”이라 불렸다.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첫 강남인 영등포와 비교하면, 현재의 강남은 아무 것도 없는, 그저 “영등포 동쪽”이라고밖에는 달리 부를 수가 없는 농촌이었다. 1990년에 간행된 『영등포구지(永登浦區誌)』 첫머리에는, 강남은 원래 영등포를 가리키는 별명이었는데 이제는 그 별명을 빼앗겨서 분하다고 적혀 있다. 


첫 강남이었던 영등포는 오늘날에도 교통의 요지로서, 그리고 정치의 중심인 국회의사당이 있는 지역으로서, 옛 한양 및 현재의 강남과 함께 서울시의 삼핵(三核)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공업지대로서의 영등포의 모습은 점차 옅어지고 있다. 공장은 지방이나 외국으로 이전하고, 그 빈터는 고층아파트단지로 재건축되고 있다. 공업지대는 20세기 전기에 영등포에 홀연히 나타났다가는 어느새인가 사라져버렸다. 대부분의 서울 시민은 영등포가 공업지대라는 성격을 탈피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뻐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유감스럽게 생각한 나는 영등포 구석구석을 걸으며 공업지대의 흔적을 찾아왔다. 그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부평 공업지대 및 김포공항 등을 포함하는 부평분지 출신이라는 자의식을 지닌 김재민이 작가를 만났다. 김재민이 작가와 함께 영등포•인천 등의 공장을 탐방한 인연으로, 사랑하는 영등포에 대한 짧은 글을 쓰게 되었다. 코로나19의 유행이 끝난 뒤에 서울을 찾으실 여러분께서, 현재의 강남 뿐 아니라 최초의 강남인 영등포도 들러주신다면 기쁘겠다. 



김시덕 (문헌학자, 답사가)





(Above two leaflet images are courtesy of Shiduck Kim)



Curated by Jun Igarashi and Tomo Ikegami


Researcher Toshihiro Fukunishi and Masaki Murakami (Maebashi) , Shiduck Kim and Yeonji Lee (Kyungin)
Music by Miyuki Fukunishi (Maebashi) ,Nadoe (Kyungin)
Designer Ayumu Iwamura (Maebashi) Nuri Cho (Kyungin)
Film by Kenichi Okayasu (Maebashi) , Jaesung Kim (Kyungin)
Performer Ai Onoda ,Haruna Uda ,Tomo Ikegami & Yuichi Tokuno 
Advisor Keum Hyun Han and  Soyoung Chung